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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아지매
김현숙의 감사미소 (8)

 

강력반 형사 남편, 대학생 아들과 함께 새콤달콤 감사인생을 엮어가는 ‘포항아지매’ 김현숙이 ‘감사하고 사랑하고 미안하고 소중하게’ 가슴속에 간직했던 이야기들을 들려줍니다. 

총각 선생님 허리 안고 달리던 자전거
누구에게나 설레는 순수의 시대가 있다

 

11-1.jpg


선생님의 자전거

“선생님의 자전거가 그립습니다.”

책걸상을 교실 뒤쪽으로 밀어붙이고, 우리들은 각자 준비해온 초와 걸레를 꺼내들었다. 먼지가 뿌옇게 내려앉은 마룻바닥에 풀썩 엉덩이를 깔고 주저앉아서는 나뭇결을 따라 초칠을 하기 시작했다.수업을 빼먹고 옹기종기 머리를 맞대고 연신 조잘대느라 그저 즐겁기 만한 시간이었다.

오십 명이 넘는 열다섯 살 소녀들의 까르륵대는 웃음소리가 교실을 가득 메웠고, 창문이 흔들리며 들썩거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가 있는 힘껏 초칠을 한 바닥이 발그레한 우리 얼굴 아래서 반들반들 윤이 나기 시작했다. 더 신이 나서 엄지와 검지에 힘을 가하며 가속도를 높여가던 중이었다.

“아~악!”

갑자기 흥을 깨는 외마디 비명소리가 내 입에서 터져 나왔다. 치마를 입고 있던 것도 잊은 채 교실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우는 나를 보고는, 흩어져서 초칠을 하던 친구들이 놀란 눈빛을 하고 몰려들었다. 나의 오른쪽 손가락 사이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엄지손톱의 반을 관통해서 깊숙이 박혀버린 가시가 초칠의 흔적인 양 나를 고통스럽게 옥죄였다.

급하게 뛰어나간 선생님께서 운동장에 자전거를 대는 사이, 몇몇 친구들이 나를 일으켜 세우고는 2층 복도를 내려갔다. 그 시각, 운동장에서는 3학년 선배들이 합동체육시간으로 피구 게임을 하고 있었다.모두들 무슨 일인가 싶어 호기심 가득한 눈을 돌리는 순간, 교내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는 미남 총각선생님께서 자전거에 올라서는 모습이 소녀 팬들에게 포착되었다. 곧이어, 어떤 계집애 하나가 내려오더니 그 선생님의 자전거 등 뒤에 올라앉는 모습이 보이자 소녀 팬들은 광분하고 말았다.

아픈 중에도 부끄러움으로 차마 나는 선생님 허리를 잡을 수가 없어서 와이셔츠 양쪽 자락만 살짝 붙들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소녀 팬들이 뛰어와서는 누군가는 욕을 하고, 누군가는 등짝을 후려치고, 또 누군가는 공을 던지고, 신발을 벗어 던지고, 모래를 뿌리는 사이 나는 순식간에 공공의 적이 되고 말았다.그 순간이었다. 선생님께서 나의 양손을 잡으시더니 자신의 허리를 꽉 감싸 안게 하시는 것이 아닌가!

“지금부터 쌩하니 달릴 테니 선생님 허리를 꽉 안고 있어야 한다. 아님, 떨어지니까. 알았지?”

모두의 원망과 부러움을 뒤로 한 채 그렇게 나는 선생님 등 뒤에 짝 달라붙어 마치 개선장군처럼 운동장을 가로질러 나갔다. 그토록 타고 싶었던 선생님의 자전거에 앉아, 그토록 잡고 싶었던 선생님의 허리를 안고, 덜컹거리는 길을 달리며 산들바람에 울음을 멈췄다.선생님의 등 뒤에 새까만 얼굴을 묻고 선생님의 와이셔츠에서 풍기는 비누 향에 취해 손톱의 쓰라림을 잊었다.

손톱에 박힌 가시 덕분에 얻은 행운이니 아린 이 가시가 영원히 내 손톱 밑에 박혀있길 기도하며. 하지만, 내 맘과는 달리 자전거 페달을 밟는 선생님의 두 다리는 분주하기만 했다.“너 큰일 났다. 이 가시 빨리 못 빼면 시집 못 간다. 어쩌지?”농담으로 겁을 주시며 로터리 화신약방을 비롯하여 몇 군데 약국을 돌아다니다 덕인의원에 이르러서야 겨우 가시를 뺄 수 있었다. 흥감스럽게 울었던 것이 부끄러운 나머지 고개를 들지 못하는 내게 선생님께선 요구르트 한 병을 쥐어주셨다.“됐다. 이제 너 시집갈 수 있겠다.”

선생님의 등 뒤에 앉아 페달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손가락에 반창고를 붙인 채 선생님 허리춤을 잡고 오던 길이, 삼십 년 전의 그 날이, 어제 일인 양 너무도 눈에 선하다.누구에게나 콩닥거리는 순수의 시절이 있다. 누구에게나 홍조를 띠는 사랑의 계절이 있다. 나의 순수의 시절! 그리운 이는 온데간데없고 녹슨 자전거만이 외로이 넘어져 있지만 내 기억 속에서는 그 시절 나의 선생님께서 그 자리 그대로 계신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양희네 할배
엄마와 전화 통화를 하던 중 이런저런 마을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며칠 전 춘택이 아저씨가 그물을 치러 바다에 나갔다가 빠졌는데, 해경과 동네 배들이 온 바다를 수색해도 시체를 찾지 못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풀 방구리처럼 드나들던 전방 집 할아버지도 돌아가셨다고 한다.

누구보다 할아버지의 죽음은 나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는 나이로 치자면 사십대부터 우리에겐 ‘할배’로 불렸지만 그래도 여든을 넘기고도 전방을 보고 오징어 건조 일을 하며 정정했다. 그런데 지난 밤 주무시다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병원을 향하는 앰뷸런스 속 차고 딱딱한 침대 위에서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는 내 유년시절 많은 기억 속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다. 고된 바다 일을 마치고 어스름이 가득 내리는 해질녘까지 아버지가 술 한 잔 거나하게 취하시던 곁에 항상 같이 계시던 분이었다. 또한 내가 취한 아버지 곁에 있을 때마다 라면땅이나 존드기, 눈깔사탕 등을 주시며 최초로 과자의 단맛에 눈을 뜨게 한 곳, 우리 동네 유일한 점방인 ‘시늘 상회’의 주인이었다.

이렇듯 나에게는 ‘시늘 상회’와 그와 아버지는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어릴 적 늘 동생 현미랑 미루며 다투던 일이 전방 집에서 취하신 채 오지 않는 아버지를 집에 모시고 오는 것이었다. 인사불성이 된 아버지 팔을 부여잡고는 “아버지요! 가시더. 집에 가서 밥 먹으시더”를 수십 차례, 매번 아버지는 “알았다. 요거 한 잔만 마시고” 하시며 계속 엉덩이를 의자에서 떼지 않으셨다.

아버지 곁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있자니 다리도 아프고, 차가운 전방 집 바닥에 앉자니 너무 추워서 덜덜 떨어야 했다. 그런 내게 따뜻하게 데워진 나무의자를 양보해주고 입이 터질듯이 커다란 알사탕 하나씩을 입에 공짜로 넣어주며 입막음을 하셨던 분.

지금은 버스가 다니고 집집마다 오토바이나 봉고가 있어 읍내 장에 들어선 큰 마트에서 모든 걸 저렴하게 사오지만 그 시절 유일하게 우리가 과자를 사먹고 생필품을 구입하던 곳은 그 전방이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아버지가 늘 위안 받으며 술 한 잔 하시던 곳이었기에 고향을 떠나와서도 내내 궁금한 소식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이제 아버지의 젊은 날과 술과 아버지 팔에 매달려 어쩔 줄 몰라 하던 어린 딸이 있던 우리 동네 유일한 전방 집 ‘시늘 상회’는 양희네 할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사라지게 되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하나 둘, 사람도 추억도 함께 늙어가며 잊혀짐을 새삼 느끼게 되는 날이다.

“할아버지! 오래도록 촉촉이 빛날 따뜻한 추억 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