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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자 2016-08-15
기 고 자 이춘선 기자
발행호수 158

“독립운동가 정재용을 아십니까?”
파고다공원의 적막을 깨뜨린 한 젊은이의 뜨거운 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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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독립… 선언서.”

1919년 3월 1일, 식민지 10년을 참고 또 참아 쌓아온 가래는 뜨거운 불덩이가 되어 한 젊은이의 입을 통해 군중 속으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차로써 세계만방에 고하야….”

정재용의 독립선언서 낭독은 파고다공원의 창공을 가르는 순간 수천 명의 가슴을 번갯불처럼 내리쳐 찢어 놓았습니다.

“아아아…. 으아아아…. 만세만세 조선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파고다공원에 모였던 군중들의 자유함성을 당시의 유행가사는 이렇게 전했습니다.

“터졌구나 터졌구나 조선 독립의 성. 십 년을 참고 참아 인제 터졌네. 뼈도 조선 피도 조선 이 피 이 뼈는 살아 조선 죽어 조선 조선 것일세.”

자주독립을 향한 이날의 거사로 삼일항쟁은 ‘천고의 빛’을 얻어 대한민국 현대사에 가장 의미 있는 날인 삼일절로 지정되었습니다. 정재용은 이 일로 1919년 8월 일본군에 의해 체포돼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습니다.

북한산 백운대에 오르면 당시 그의 행적이 가로 1.2m, 세로 3m 크기의 바위에 전체 69자로 기록돼 있습니다. 바위 바닥 네 귀퉁이에 ‘경천애인’ 네 자를 새긴 뒤 그 안에 ‘독립선언문은 기미년 2월 10일 육당 최남선이 썼고,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정재용이 독립선언만세를 앞장서 불렀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습니다.

당시, 고종 황제의 승하로 인해 덕수궁 앞에는 흰 옷 입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조의를 표하며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파고다공원 또한 예외도 아니었습니다. 이에 앞서 불과 2주 전에 전국으로 한 통의 비밀편지가 배달됐습니다.

‘독립선언. 날짜는 3월 1일. 파고다공원 정오. 재정은 천도교가 대고 인원 동원은 기독교가 맡소. 때 맞춰 상경하시오.’

그러나 민족대표 33인은 유혈 충돌이 우려돼 고급 식당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하자는 결정을 내리게 됐고, 민족대표 33인이 없는 휑한 파고다공원에 서 있던 한 젊은이의 가슴은 타들어 갔습니다.

점점 모이는 군중들을 보며 정재용은 두려움과 수많은 갈등 속에서 ‘오직 대한독립’이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품안에 든 종이 한 장을 꺼내들었습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과 입으로 ‘조선독립선언서’를 또박또박 낭독하며 파고다공원으로 몰려든 군중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힘껏 외쳤습니다. 모든 군중의 가슴을 파고들어 한 맺힌 10년의 시간을 자유의 함성으로 맞바꾼 한 젊은이의 선택은 자유독립을 향한 힘찬 행진의 첫걸음이 됐습니다.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당시 조선 사람들을 “노예근성이 충만하고 자신을 위해 주먹 한 번 쓸 줄 모르는 비참한 백성들”로 평가했습니다. 당시의 대한민국은 제대로 된 전쟁 한 번 없이 이웃 나라에 병합되어 버린 별 볼 일 없는 나라로 미국, 러시아, 중국, 만주 등 주변국으로부터 평가절하됐습니다.

그러나 한번 터진 ‘대한독립만세’의 자유의 함성은 수많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잠자던 자유에 대한 의지와 열정을 불태워 전국 방방곡곡을 태극기로 뒤덮이게 만들었습니다.

부산 지역 열여섯 명의 여학생들은 자신의 혼숫감으로 부모님이 장만해 놓은 광목을 몰래 숨겨 가지고 밤새 국그릇을 갖다 대 그린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불렀습니다. 진주에서는 걸인과 기생들이 앞장서서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으며, 두만강 건너 용정에서는 3만 명의 동포가 운집해 중국과 일본 관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날 소리 높여 외친 ‘대한독립만세’의 절절한 자유의 함성은 한 달 만인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탄생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해냈습니다.

매년 삼일절, 광복절이 되면 우리는 ‘대한독립만세’를 부릅니다. 그 목소리의 진원지는 한 용기 있는 젊은이, 정재용의 비장한 선택이었습니다. 죽음을 각오한 그분의 행동은 옮음에 대한 나눔의 정신이었습니다. 106년이 지난 지금, 정재용 독립운동가에게 다음과 같은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또 다른 나눔의 정신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정재용 님, 당신의 용기 있는 결단력과 실천이 대한민국의 자유독립을 앞당겨주어 감사합니다.”